•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한민족 전투원형귀주대첩(龜州大捷)

연관목차보기

귀주대첩(龜州大捷)

시대 : 고려
시기 : 1019년(현종 10) 2월 1일
전투지역 : 평북 귀주군
전쟁상대국 : 요나라
상세내용

고려 현종 10년(1019) 평안북도 귀주에서 고려군이 거란의 대군을 섬멸한 전투.

거란의 성종은 여러 차례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자 1018년 12월에 10만 대군이라고 칭하면서 소배압을 주장으로 하여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300명을 안주에 주둔시켰다. 강감찬은 다시 흥화진으로 나아가 정예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내(흥화진 앞의 삼교천)를 막아 수공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거란군은 수심이 얕아진 삼교천을 아무런 의심없이 건너기 시작하였다. 거란의 주력이 삼교천의 중심부에 이르자 고려군은 물을 터서 거란군에게 수공을 가하였고, 거란군 진영이 수공으로 혼란해지자 고려군은 이번에는 매복해 두었던 병력으로 하여금 기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배압은 이에 개의치 않고 개경을 향하여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에 강민첨이 이를 추격하여 자산의 내구산에서 이를 대파하고, 또 마탄에서도 1만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계속하여 개경을 향해 공격을 하니 고려군은 이에 대한 새로운 방어계획을 준비하였다.


귀주는 우리나라 서북쪽의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이다. 특히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오기 위해서는 서북계의 북로와 남로 두 통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귀주는 북로의 중심지가 된다. 그런 까닭에 귀주는 중국으로부터 침공이 있게 되면 항상 대접전이 벌어졌던 지역이었다. 한편 소배압의 거란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019년 1월 3일에는 개경에서 백리 떨어진 신은현(신계)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군은 청야전술로 대응해 도성 밖의 곡식은 제거하고 백성들은 성 안에서 군관민 합세하여 대비하였다. 이처럼 고려군의 대비가 강화되자 소배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고려군은 개천과 영변에 이른 거란군을 급습하여 5백여명을 죽였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이 2월 1일 귀주를 황급히 빠져 나가려 하자 이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이를 요격하였는데, 마침 개경에서부터 추격해오던 고려군이 가세하고 또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몰아와 고려군에게 유리해져서 이를 틈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들을 덮었으며, 말과 무기 등 노획한 물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 10만이라고 칭하던 요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거란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려 침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참패였다. 거란의 성종은 이 전투 패배의 책임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가벼이 여겨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여버리리라”고 할 정도로 진노하였다고 한다.